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 - 마이클 슬롯

<뒤늦게나마 올리는 현대윤리학연습(2012년 1학기) 발제. Michael Slote, Agent-based Virtue Ethics(in Roger Crisp & Michael Slote, Virtue Ethics) 요약.>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

 

마이클 슬롯은 이 논문에서 행위자에 관한 평가에서 덕윤리학이 새로 제시할 수 있는 방향에 관해 서술하고자 한다. 그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라는 방식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그의 생각을 따르고 있는 것만은 아니고, 또한 그 동안에 덕윤리학에 관한 논의가 놓쳐왔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포함해 덕윤리학을 다른 방향에서 정초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려 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윤리학적 접근방법이 실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이 가능한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논문은 마무리된다.

먼저 행위자에 기반을 두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덕있는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덕있다고 평가받는 것은 그 사람이 덕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행위가 사람들이 덕있다고 평가하는 행위와 우연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단순히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행위가 덕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덕있는 행위들이다. 또한 그 사람을 덕있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해온 행위들을 종합해보고 그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고려이다. 이 경우는 행위자 초점접근방식이다. 반면에 행위자 기반접근방식은 행위자의 내면의 상태에 더욱 주목해서, 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동기들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적인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행위를 평가한다. 그 사람이 덕있는 사람인 이유, 또는 덕있는 행위를 한 이유는 그의 내면이 덕있는 상태이고 또 그 상태에서 나온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영혼을 먼저 평가한다면 그것은 행위자 기반 방식인데, 반면에 영혼의 단계를 먼저 평가한다면 그것은 행위자 초점 방식이다.

행위자에 기반한다는 것의 의미가 행위자의 동기에 그 도덕성과 윤리적인 평가를 집중시킨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동기에 기반해 윤리적 평가를 하는 이론에 관한 반대들은 행위자 기반 방식에 반대하는 것도 될 것이다. 슬롯은 사람들을 해칠 마음으로 재판관이 된 사람이라는 시즈윅의 사례를 든다. 동기에 의해서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한다면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경우, 그 재판관이 재판행위를 하는 이유가가 옳지 않다는 이유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도덕적이고 법적인 의무를 등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들어 행위자에 기반함에 반박하는 것은, 이 사례에서 보자면, 재판을 하지 않을 더 강한 동기를 제공해주지 못하므로 행위에 아무런 변화를 줄 수가 없다.

이것보다 더 강한 반대들도 있을 수 있다. 만약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평가를 내면의 상태의 유형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면, 옳은 내면적인 상태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어떤 도덕적 요청들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 즉 일종의 주관주의적인 윤리이론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자 기반의 접근방식에서 이런 결론이 필연적으로 이끌려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슬롯의 주장이다. 존경받을만한 내적인 상태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그 소유자가 자기가 할 행위를 쉽게 고를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 그 사람은 그 내적인 상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잘 알고 있지 않다면, 그런 내적인 상태를 외부에 표현하는데 번번히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자비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행위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표현하는데도 실패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도 덜 존경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런 내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아무 행위나 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행위를 우선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 슬롯의 결론이다.

그리고 윤리적인 평가에 관해서 그 방향이 일방적이라는 의미, 즉 윤리적인 행위가 언제나 행위자 내부에서 세계로 나아가기만 한다는 의미에서 행위자 기반 방식이 자기폐쇄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필연적인 결론은 아니다. 내적인 상태를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 또는 실제로 그런 상태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해야하는지 또는 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를 경험적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또한 반대로 이런 적절한 사실들에 관해 아는 것은 적절한 내적인 상태를 갖추게 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슬롯은 이런 행위자 기반 방식을 다시 차가운 방식과 따뜻한 방식으로 나눈다. 차가운 행위자 기반 방식은 내적인 강함으로서 개인의 행위의 도덕성과 윤리적 성격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내적인 강함은 덕있는 모든 행위를 위한 튼튼한 기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초로부터 덕있는 행위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더 자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반면 동정심이나 자비로움과 같은 것들을 덕있는 행위의 기초로서 간주하는 것은 따뜻한 방식이다. 이것은 행위자 기반 방식이 고려하는 내면적인 상태로서의 도덕성이라는 목표와 더 잘 부합한다.

 

도덕성의 종류들 내적인 강함

 

도덕성을 내적인 강함으로 정의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는 플라톤이다. 이것은 다른 어떤 근거도 요구하지 않고 그 스스로 도덕성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근거라는 사실이 직관적이다. 하지만 플라톤이 아닌 다른 사람과 다른 시대에도 이것이 모든 도덕적 행위의 기초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 슬롯에 따르면 플라톤은 이것에 관해 적절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내적인 강함을 그는 현대적인 의미의 자기신뢰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 도덕적 행위들을 이끌어내는지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자기 신뢰는 어른들의 상태와 비슷한 무엇이다. 어른들은 자기충족적인 세계관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고, 여러 상황들에 관해서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표현한다. 반면에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내적인 상태를 질투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행위하고 또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배운다. 슬롯은 이것을 기생이라고 표현한다. 자기신뢰가 없는 사람은, 가족을 벗어나 독립할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상태에 비유된다. 자기신뢰라는 내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존경받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행위 때문에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적인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비난받는다. 내적인 강함은 어떻게 도덕적인 행위와 연결되는가? 슬롯은 그들은 스스로를 돕고, 그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 또한 도우려는 경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적인 강함과 덕있는 행위의 연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용기있는 사람은 불쾌한 사실들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결과들이 참담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사실을 직면하는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덕이 되는 이유는 그것을 덕으로 만들어주는 다른 것이 있지 않고, 우리가 그런 상태를 가지기를 갈망한다는 가장 직관적인 상황들에 기초해있다. 자기기만과 반대되는 자기 신뢰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덕있는 행위의 기초가 된다. 같은 방식으로 자립하려는 노력과 그렇게 하려는 내적인 상태는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존경받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성공적이지는 않더라도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장애인들을 우리는 존경한다. 우리 또한 이런 자기신뢰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다면, 아마도 그 장애인과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기신뢰는 우리의 도덕적 의무들과도 연결되어있다. 약속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 생각해보자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슬롯이 보기에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행위를 통해 기생하는 것이다. 또한 절제와 근면 같은 덕목들은, 자신의 환경과 처지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텐데 이것 또한 자기신뢰와 기생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자기신뢰와 이타적인 행위 사이의 연관은 니체에 의해서 잘 드러난다. 이타적 행위는 자기충족성을 달성하는 한 이상적인 방식이 될 수도 있다. , 과다하게 충족되었을 때는 자신의 고귀함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는 자기신뢰 자체는 그다지 이기주의적이지 않다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슬롯은 이 부분까지 지면이 부족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고 있다.) 어쨌든 내적인 강함이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 덕목들은 용기, 자기신뢰, 절제, 관대함 등이다. 슬롯은 여기에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덕목은 자신의 고유한 좋은 목적들과 의도들을 오랜 시간동안 지켜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도덕성의 종류들 보편적인 자비로움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 도덕성을 정의한 역사적인 사례는 제임스 마티뉴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동기에는 질서가 있고, 도덕적 결정들은 서로 다른 두 동기 사이의 갈등 속에서 생겨난다. 만약 그 결정이 더 상위의 동기에 의해서 행해졌다면 그것은 옳고, 그 반대의 경우엔 나쁘다. 그의 동기들 가운데 동정심은 신을 위한 숭배 다음으로 고차원적인 동기이다. 시즈윅의 경우 마티뉴의 이러한 입장이 특정한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낮은 동기에 의해서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비판하였으며, 그의 이론을 보정하기 위해 가장 고차원적인 동기들로서 정의, 신중함, 보편적인 자비로움 같은 것들을 설정한다. 그렇다면 이제 행위들은 고차원적인 동기들에 따르는 행위들을 참고했을 때 그 옳고 그름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시즈윅은, 이 고차원적인 동기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한 뒤, 단순한 공리주의에서 끝나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자에 기반한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자료가 되는데, 아마도 행위의 동기의 배열들에 관해 심각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 같다.)

슬롯은 자신이 도울 수 있고 또 그 도움이 필요한 친구가 있지만, 또한 그 대신 수영을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면 제3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사람의 사례를 들고 있다. 만약 수영을 하러 간다면, 나와 제3자가 얻을 수 있는 행복의 크기가 더 크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수영하러 가는 것을 덕있는 행위라고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부합하지 않는데, 그것은 단순히 결과에 대한 고려뿐만이 아니라 그 동기 또한 고려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가 즐겁기 위해서 수영을 하러 가는 것은 친구를 돕는 것보다는 덜 도덕적인 행위이다.

공리주의와 자비로움을 비교하는 또 하나의 사례는,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병원을 지을 돈을 기부하는 사람이다. 공리주의자들과 결과주의자들은 이 행위를 선하다고 할텐데, 그것은 보편적인 자비로움이 산출할만한 결과와 동일한 일을 하려는 동기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러한 동기들과 도덕적으로 진지하게 존경받을만한 동기들을 구별하고, 또한 그렇게 할 줄 안다. 그러나 결과주의는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에 관해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와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기반한 도덕성은 계속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노출하는데, 보편적인 자비로움이라는 동기에서 출발한 행위들이 같거나 비슷한 결과들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 행위에서 동기들을 어떤 지위로 고려하는지에 따라서는 그 둘이 다르다.

슬롯은 행위자 기반 방식을 공리주의적인 관점을 통해 조금 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공리주의는 전체로서의 인류 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관한 개념을 제공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그들의 행위가 보편적인 자비로움에서 나올만한 행위에 충분히 가깝다면(그리고 실제로 그것에 가까운 동기로부터 나온 행위라면) 옳다. 이 둘은 서로 교차적으로 적용되는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 그런 동기들과 그런 결과들을 의도하지 않고 행위한다고 하더라도(북아일랜드의 해방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 소비자 운동을 하는 사람), 그런 것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충분히 그런 동기에 의해 행위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인간의 웰빙에 관해 너무 좁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의무주의자들이 고려하는 몇몇 측면들에 관해 무지하다는 것도 단점이다. 이런 면에서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공리주의적 요소와 결합하여, 동기를 중요시하며 동시에 결과들을 고려함으로써 많은 비판과 기존의 이론들의 한계에 대답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슬롯은 주장한다. 또한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는 (차가운 행위자 기반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언급했듯이) 직관적이라는 이점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들과 더욱 부합한다.

 

도덕성의 종류들 돌봄

 

돌봄은 보편적인 자비로움과 반대되어서 부분적이고 편파적인 또는 자기중심적인 자비로움으로 정의된다. 어떤 특정한 존재를 위한 자비로움이 덕있는 행위 전체의 근거가 된다는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도 보이긴 하지만, 그는 신에게 의존했으므로 우리는 이제 순수하게 세속적인 방향에서 이것을 구조화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 관한 저작인 다른 목소리로에서 캐롤 길리건은 남성들이 도덕성을 권리, 정의, 자율성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반면 여성들은 돌봄, 책임, 상호관계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넬 노딩스는 여성적으로 고유한 도덕성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돌봄 개념을 언급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이론들을 행위자에 기반한 방식과 일관되게 만들기 위해서는 보충적인 논증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딩스의 윤리학을 행위자에 기반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녀는 돌봄을 표현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장려되어야 하고, 또한 그것이 이 세계의 도덕적 행위들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명령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동기가 아니라 명령에 기반했으므로 행위자에 기반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슬롯이 보기에 노딩스의 이러한 관점들은 은연중에 행위자 기반 방식을 함축한다. 만약 구호활동을 위해 어떤 사람이 사람들을 모은다고 하자(돌봄행위를 장려하는 좋은 사례인 듯 하다). 그는 그렇게 장려하는 것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일반적으로 더 좋은 것을 제시하기 위한 행위를 하고 있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직접 돌봄을 하라고 권하는 것보다도 더 배가 되는 효과를 가지고, 이것은 그 활동을 하려고 모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서 돌봄과 그것을 장려하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이것들이 도덕적인 탁월함의 한 예가 되기 때문에, 이런 행위들은 행위자 기반 방식에 의해서 조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덕이론의 생산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무관한 제3자들에 관해 좀 더 말해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돌봄으로서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인 것을 고려하는 그 어떤 도덕이론보다도 자신들이 낫다고 이야기하며, 또한 실제로 그런 행위들이 존경받을만하고 선호할만하게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왜 보편적인 이론이 더 나은지 명확하게 말할 수도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을 적용하기

 

그러나, 행위자에 기반한 덕 윤리학에 관한 우리의 두 좋은 형식들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과 돌봄으로서의 도덕성 은 이제 반드시 언급해야만하는 한 더한 어려움과 마주한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어찌해야할지 모를 도덕적 문제와 함께 마주되었을 때, 그것은 어쨌든 부적절해보이고 또한 심지어는 사람들과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보다는 오히려 그의 고유한 동기들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 허용하고 또한 심지어 지시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보편적인 또는 특수주의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우리에게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옳고, 또한 받아들일만한지 아닌지, 말하자면, 늙어서 죽어가는 부모를 살린 상태로 두려는 과감한 수단들의 사용에 반대하는 것은 이 당사자의 동기들에 달려있는지, 또한 이것이 죽어가거나 또는 고통받는 부모를 위한 과감한 수단을 옹호할지 또는 반대할지를 알지 못하는 어떤 한 사람을 위해서 전체적으로 도움이 될만한가? 동기들 안을 살펴보는 것은 아마도 저 사람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러므로, 우리가 대부분 도덕적인 지도가 필요한 곳에서, 그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도덕적 어려움들을 향한 한 답을 찾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처럼 보인다.

덕 윤리학의 몇몇 방어자들은 덕 윤리학이 행위자에 기반하든 또는 다른 것이든 실천적인 도덕적 주제들에 응용될 수 없다는 것을 승낙하길 바라고 있지만, 그러나 덜하지 않게 덕 윤리학이 도덕성에 관한 올바른 이론이나 관점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이 응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덕 윤리학을 위해서 더 좋으며, 또한 나는 자비로움과 같은 한 내적인 상태가 이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또한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모으는 것과 함께 그 자체를 고려하는 방식에 관해 앞에서 이야기된 것의 사용을 더 나아가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이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약 한 사람이, 말하자면 그것의 행위자의 동기들의 자비로움을 향한 참고에 의해서 행위나 결정의 한 특정한 과정을 도덕적으로 판단한다면, 한 사람은 그 스스로 이 세계 안의 사람들에 관한 사실을 참고하고 고려하는 한 내적인 요소들을 향한 관계 안에서 곧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내면적인 응시는 효과적으로 세계를 향해 되돌아가고’, 또한 마치 우리가 한 순간 안에서 더욱 자세한 것 안을 보게 되는 것처럼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무엇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만하거나 또는 하는 데 가장 좋은가를 결정하려는 한 사람의 시도 안인 생각 속으로 집어넣는 것을 한 사람에게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되돌아감은 도덕적 노력에 관해 불필요하게 이중적이거나 또는 필요없는 것인데, 만약 우리가 저런 동기가 기본적으로 적어도 모든 행위의 도덕적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렇다. 만약 이 세계에서 그들의 효과에 의해서 단순하게 행위들이나 우리 스스로나 다른 이들을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도덕적으로 존경하고 또한 도덕적으로 좋고 칭찬받을만한 행위들로부터 우연히 또는 아이러니컬하게 유용한 행위들을(또는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끝내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그의 늙은 어머니가 병원에 갑자기 실려갔다는 것을 듣고는 어머니와 같이 있으려고 먼 도시로부터 날아온 어떤 한 사람을 고려해보자. 몇몇 또는 다른 형식 안에서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주어지고 또한 그가 어머니가 살아가면서 관계맺은 유일한 사람이라면, 그는 그가 병원에 갈 때 그의 부모와 함께 또는 부모를 위해서 도덕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주제를 어떻게 풀어야만 하는가? 예를 들면, 그는 그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과감한 수단을 옹호해야 하는가? 물론 자비로움의 (한 또는 다른 형식) 으로서의 도덕성은 이 질문을 향한 답변을 그에게 주지는 않지만, 그러나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무지와 그의 어머니의 특수한 조건과 전망들에 관해서는, 이 지점에서 저 질문을 향한 답을 내는 대부분의 도덕 이론들에는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그가 병원에 갈 때 그가 도덕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향한 답을 그에게 내준다. 그것은, 미래의 고통과 무능력함을 고려하는 한 확실하게 삶의 질과 지속성을 고려하는 것, 즉 그의 어머니의 조건과 전망들에 관해 더 많이 도덕적으로 알아내야만(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쁜) 한다고 그녀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실제 동기들을 향한 참고에 의해서 이것을 그에게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만약 그가 더 알아보지 않고 할 것을 결정한다거나 또는 현재의 상대적인 무지에 기초해서만 그의 어머니에 관해 옹호할 것을 결정한다면, 그는 자비로움과는 동떨어진 (그의 어머니에게) 한 냉담함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전원을 끊을 것을 결정하거나 또는 그의 어머니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아는 것 없이 과감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무심함과 냉담함을 보여주고, 또한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라는 이러한 기초 위에서는 그가 어떤 결정이라도 내리기 전에 더 많은 것을 찾아야만 한다는 도덕적 판단을 만들어줄 수 있다.(내적인 강함으로서의 도덕성이 비슷한 결론을 낳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면, 그 사실들이 일어나있으며 또한 그들이 실제로 명확하며 또한 그녀의 어머니에게 끔찍한 아픔과 쇠약해질 전망들을 가리킨다고 해보면, 그 사람의 결정은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으로부터 다시 한 번 그럴듯하게 이끌어질만하다. 이 지점에서, 그것은 과감한 수단을 주장하는 것은 그의 냉담함이 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자비로움이 되며 또한 적절한 도덕적 결론은 그러므로 행위자에 기반한 고려들에 의해서 도달될 수 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스스로 이런 방식 안에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어떤 한 사람은 말할지 모른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아픔 또는 즐거운 미래의 존재를 가지는지 아닌지에 관해 고민하고, 예를 들면, 만약 그가 어머니의 존재를 연장할 것을 알았다면 그가 스스로 냉담하게 할지 안할지에 관해서는 아니다. 이것은 납득할만한가? 그는 만약 어머니가 살아간다면 거의 겪을 미래의 고통들에 관한 단순한 참고에 의해서 또는 말하자면 더욱 복잡하고 풍부한 것에 의해서 둘 가운데 하나에 의해 과감한 수단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결정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가: 그것은 주어진 그녀의 전망들 속에서 어머니를 산 채로 두려고 시도하는 나의 냉담함이 되는가? 물론, 도덕적인 문제풀이의 한 표현으로서의 후자에 관해서 유별난 것도, 운이 나쁜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역사적인 사실의 한 요소로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옹호하면서 만들어진 논증들에 관해 생각해보자. 부통령 앨 고어와 하원의 야당 원내대표인 로버트 미첼은 그것이 이 세계와 아메리카의 미래에 비굴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태도를 채용하게 될 것을 거부하는 토대들 위에서 이 협정을 방어했다. 그들은 결과들에 관해 더욱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어왔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 주제를 제출하는 방식에 관해 비합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또한 그래서 나는 내적인 동기들의 외적으로 보이는 성격이 주어지면,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은 더 일반적인 공리주의와 결과주의와 같은 이런 실천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도덕적 이론들을 향해 저런 유효함에서 어깨를 나란히하는 도덕적 주제들에 관한 해법을 위한 재료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맺고 싶다.

어려운 또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실천적인 도덕적 주제들을 향한 대답 안에서 우리의 평범한 생각은 동기들 또는 결과들 또는 둘 다에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주의는 궁극적으로는 결과들에 그리고 단지 간접적이고 유용한 접근의 한 방법으로서만 공평한 자비로움같은 동기들에 관한 고려에 도움을 청하는 것에 의해서 이런 주제들에 답을 낸다. 자비로움으로서의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은 궁극적으로는 동기들에,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결과들을 취하는 것에 도움을 청하는 것에 의해 반대의 유형 안에서 문제에 답을 내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이런 동기들(과 함께인 사람들)에 의해 고려되고 또한 이런 동기들을 향한 답변 안에서 탐사된다. 각각의 접근은 많은 도덕적 어려움들 또는 문제들에 관한 경우에 따른 답을 허락하고, 또한 그래서, 응용 윤리학의 전체 문제를 향한 고려와 함께, 어떤 접근법도 이로움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또한 실천적인 도덕적 문제들에 부적절하게 된다거나 또는 그들의 해법을 달성하기에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때문에 행위자에 기반함을 비판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확실히,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우리의 도덕적 어려움들에 답을 낼 수 없게 되는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만약 그의 어머니에 관한 사실들이 배워지지 않았거나 또는 완전히 복잡해지게 된다면,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오히려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에 가치가 있는 어떤 결과주의도 이런 한 경우들 안에서는 텅 빈 것으로 다가오며, 또한 그것은 저런 관점들의 강함이지만, 특수주의적인 또는 보편주의적인 형식이든 자비로움으로서의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도 그에 못지 않고, 이런 관점들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 또는 합리적인 힘들을 벗어나는 경우들 안의 어려운 도덕적 질문들을 향한 답변을 알 것이라고 추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할지와 무엇을 느낄지를 아는 것을 언제나 너무 쉽게 만드는 어떤 윤리이론도 그걸 확장해봤을 때 결함이 있거나 심지어는 쓸모없게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도덕적 현상의 배배 꼬인 복잡성에 관한 우리의 멀쩡한 감각의 부정확성 때문이다.

덕윤리학의 부활 이래로, 이 주제에 흥미로운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또는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생각들에 관해 주로 초점을 맞춰왔다. 나는 도덕성에서 덕으로(덕의 부활)안에서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생각들을 스스로 방어해왔지만, 그러나 우리는 행위자에 기반한 덕 윤리학의 특정한 형식들 또한 진정한 약속과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보았다. 덕윤리학이 그것의 세력을 확장하는 기간 안에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혼자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요법들을 필요로 한다.

 

 

덧댐.마이클 슬롯의 책 하나가 이미 번역이 되어있다. 제목은 『덕의 부활』이다. 행위자기반의 덕윤리학이라는 개념과, 다른 윤리학적 입장과 비교해 이 입장이 어떤 부분에서 더 나은지에 관한 설명이 주를 이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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